당신이 옳다(2018)_정혜신_해냄

어떤 마음에서 그런 건데?
네 마음이 어땠는데?
존재에 집중해서 묻고 답하고 듣는 시간 동안
둘의 마음이 서서히 주파수가 맞아간다.
소리가 정확하게 들리기 시작한다.
공감 혹은 공명이다.
p.52
"집을 나가겠다, 일을 때려치우겠다, 죽겠다, 죽이겠다"는 말에 "네가 그러면 되느냐, 그러면 안된다"는 류의 말들은 절박한 사람의 말귀를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의 반응이다.
나는 그런 때 언제나 "그렇구나, 다 때려치우고 싶을 만큼 지쳤구나, 다 불태워버리고 싶을 만큼 화가 나는구나, 그럴 만한 일이 있었나 보구나"라고 온 체중을 실어 말한다. 그 다음에 "그런 맘을 들게 했던 그 일이 구체적으로 뭔데?"라고 묻는다. 그가 누구이든 어떤 상황의 하소연이든 예외없다.
(중략)
그런 마음이 들 때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을 거라고, 그러니 당신 마음은 옳다고, 다른 말은 모두 그 말 이후에 해야 마땅하다. 그게 제대로 된 순서다.
p.59
가장 절박하고 힘이 부치는 순간에 사람에게 필요한 건 '네가 그랬다면 뭔가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너는 옳다'는 자기 존재 자체에 대한 수용이다. '너는 옳다'는 존재에 대한 수용을 건너뛴 객관적인 조언이나 도움은 산소 공급이 제대로 되지 않은 사람에게 요리를 해주는 일처럼 불필요하고 무의미하다.
p.80
죽고 싶은 마음에 대해묻기 시작하지만, 이야기를 하다 보면 죽고 싶은 마음 언저리에 있는 그 사람의 일상에 대해 묻고 듣고 이야기를 나누게 된다. 일상에 대해 구체적으로 관심을 가지다가 그 일상과 '그의 죽고 싶은 마음'의 연결에 대해 궁금한 것이 생기면 또 물으면 된다.
어떤 것을 묻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죽고 싶다는 마음을 미쳤는데도 그 고통이 아무 관심도 맏지 못하고 방치되거나 외면되지 않는 것 자체가 중요하다.
사람들은 누가 죽고 싶다는 말을 했을 때 그 마음에 대해 자세히 묻는 것은 상대에게 상처를 주는 행위라 여긴다. 정반대다. 고통 속에 있는 사람이 가장 절박하게 원하는 이야기가 바로 그것이다. 심각한 내 고통을 드러냈을 때 바로 그 마음과 바로 그 상황에 깊이 주목하고 물어봐 준다면 위로와 치유는 이미시작된다.
무엇을 묻느냐가 아니고 나에게 집중하고 나의 마음을 궁금해하는 사람이 존재하는 것 자체가 치유이기 때문이다.
p.105
엄밀히 말하면 어릴 때부터 부모에게 맞고 살아온 사람이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내밀한 자기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존재 자체에 대한 이야기가 안일 수 있다. 부모에게 맞던 그 아이가 느꼈던 무력감이나 수치심에 대한 이야기가 그의 존재 자체에 더 가까운 이야기다. 가정 폭력에 시달린 아이가 느끼는 감정은 자라면서 분노나 무감각 등으로 얼마든지 바뀔 수도 있다. 그런 감정들을 떠올리고 얘기할 수 있다면 그것이 존재 자체에 대한 얘기다. 내 상처의 내용보다 내 상처에 대한 내 태도와 느낌이 내 존재의 이야기다. 내 상처가 '나'가 아니라 내 상처에 대한 나의 느낌과 태도가 '나'라는 말이다.
p.106
누군가 고통과 상처, 갈등을 이야기할 때는 '충고, 조언, 평가, 판단'을 하지 말아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대화가 시작된다. 이는 고통에 빠진 사람의 상황에서 고통은 소거하고 상황만 인식할 때 나오는 말이다. 고통 속 상황에서 고통을 소거하면 그 상황에 대한 팩트 대부분이 유실된다. 그건 이미 팩트가 아니다.
불행하게도 우리 일상의 언어 대부분은 충조평판이다.
"그런 생각은 잊어. 너한테 좋을 게 하나도 없어"- 충조
"그럴수록 네가 더 열심히 하고 배우려는 자세를 가져야지."-충조
"긍정적으로 마음을 먹어봐."-충조
"그건 너를 너무 사랑해서 한 말일 거야."-평판
"네가 너무 예미해서 그런거 아니니?"-평판
"남자는 다 거기서 거기야. 별다르 사람 있는 줄 아니."-충조평판
p.143
아이에게 칭찬할 때 "와우! 성적이 그렇게 올랐구나. 참 잘했다"는 식으로 오른 점수에 방점을 찍는 칭찬보다는 "성적이 그렇게 많이 올랐구나! 네가 이번에 정말 노력을 많이 했나 보다. 참 애썼어." 라고 한다면 오른 성적보다 아이의 존재 자체에 집중을 한 것이다. 성적이 오르는 상황을 이끌어낸 '아이자체'에 집중을 한 것이다. 외형적 성과나 성취자체에 대한 과도한 방점은 사람에게 성과에 대한 불안과 강박을 가져오지만 존재자체에 대한 집중은 안정과 평화를 준다.
공감은 누군가의 불어난 재산, 올라간 직급, 새로 딴 학위나 상장처럼 그의 외형적 변화에 대한 인정이나 언급이 아니라 그것을 가능하게 한 그 사람 자체, 그의 애쓴 시간이나 마음씀에 대한 반응이다.
그런경험을 반복적으로 하면 사람은 그런 외형에 덜 휘둘리며 살 수 있게 된다. 공감은 쓰러지는 사람을 일으켜 세울 만큼 큰 힘이 되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 힘은 그가 고요하게 가만히 있어도, 특별히 무언가를 하지 않아도 자기 자신만으로도 초조하지 않을 수 잇는 차돌 같은 안정감의 형태로도 나타난다. 공감의 힘은 그렇게 입체적이다.
p.267
공감은 내 생각, 내 마음도 있지만 상대의 생각과 마음도 있다는 전제하에 시작한다. 상대방이 깊숙이 있는 자기 마음을 꺼내기 전엔 그의 생각과 마음을 나는 알 수 없다는 데서 시작하는 것이 관계의 시작이고 공감의 바탕이다.
p.276
공감을 잘하기 위해서 어떤 질문을 하는 게 좋을까 고민할 필요가 없다. 좋은 질문은 따로 있지 않다. 아이의 대답에 집중하고 궁금해하는 태도가 어떤 좋은 질문보다 더 좋다. 그 태도가 더 공감적이고 치유적이다.
엄마가 내게 무엇을 요구하고 기대하는 마음 없이 여유 있게 내 존재 자체에만 관심을 갖고 주목하고 있다는 느낌은 아이의 입장에서 더할 수 없이 안전하고 편안하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공감이 그것이다. 아이에게도 배우자에게도 사회적 관계의 누군가에게도 똑같이 적용되는 원리다.
"넌 누구니?"
"지금 이 순간이 너한테는 어떠니?진심으로 마음을 움직이는 거니? 재미있니?"
평가의 질문이 아니다. 내 존재에 집중하는 질문이다.
지위, 권력, 재산이나 역할은 얼마든지 바뀔수 있다.
가치관 신념도 바뀌거나 타협할 수 있다.
내 느낌, 내 감정, 내 마음은 내 존재 자체라서 무조건 주목하고 수용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