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이 선생이다/황현산/문학동네
발췌
12P.
어떤 사람에게는 눈앞에 보자기만한 시간이 현재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조선시대에 노비들이 당했던 고통도 현재다. 미학적이건 정치적이건 한 사람이 지닌 감수성의 짙은 그 사람의 현재가 얼마나 두터우냐에 따라 가름될 것만 같다.
15P.
중요한 것은 학생의 생각이나 의문이 아니라 이미 정해져 있는 문제와 대답의 각본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토론식 수업의 중요성을 역설하고, 학생이 질문을 많이 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코드는 토론되는 것이 아니라 규정되는 것이고 각본에는 질문이 끼어들 틈이 없다.
27P.
몽유도원도 관람기
사람들은 반드시 몽유도원도가 아니라 해도 위대한 어떤 것에 존경을 바치려 했으며, 이 삶보다 더 나은 삶이 있다고 믿고 싶어했다. 저마다 자기들이 서 있는 자리보다 조금 앞선 자리에 특별하게 가치있는 어떤 것이 있기를 바랐고, 자신의 끈기로 그것을 증명했다. 특별한 것은 사실 그 끈기의 시간이었다. 그 시간은 두텁고 불투명한 일상과 비루한 삶의 시간을 헤치고 저마다의 믿음으로 만들어낸 일종의 전리품이었기 때문이다. ....긴 행렬은 이 삶을 다른 삶과 연결시키려는 사람들의 끈질긴 시위였다.
사실 어떤 특별한 것은 있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저 우리의 믿음이 끈기의 시간을 만들었고 그 시간들이 무언가를 만들어 낸 것일 수 있다. 특별한 것은 사실 그 끈기의 시간인 것이다. 또 어쩌면 바라던 결과가 아니더라도 그 끈기의 시간들이 이미 그 시간 자체로 어떤 결과를 만들내고 있다. 그런데 어느 때부터 우리 삶이 투명에서 불투명이 된 것일까?
33P.
그 세상의 이름은 무엇일까
그러나 정작 비극은 그다음에 올것이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죽음도 시신도 슬픔도 전혀 없었던 것처럼 완벽하게 청소되어, 다른 비슷한 사연을 지닌 동네와 거리들이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세련된 빌딩과 고층 아파트들의 아무것도 모른다는듯 그 번들거리고 말쑥한 표정으로 치장"될 때 올 것이다. 그때부터 사람들은 부끄러움이 무엇인지 모를 것이다. 사람이 억울한 일을 당하면, 사람이 불타면, 사람이 어이없이 죽으면, 사람들은 자기가 그 사람이 아닌 것을 다행으로만 여길 것이다. 그러고는 내일이라도 자신이 그 사람이 될까봐 저마다 몸서리치며 잠자리에 누울 것이다. 그것을 정의라고, 평화라고 부르는 세상이 올 것이다.
단상
사람들은 어떤 마음이 들때 움직이는 것일까?
못 본척한다는 것이, 가만히 있는 다는 것이 참을 수 없는 부끄러움으로 오는 때는 어떤 때일까?
70년대 80년대 거리로 나간 시민들의 마음엔 무슨 감정이 일었던 것일까?
모두가 평화로운 시기는 있을까?
"누구에게 벌어진 일이라면 나에게도 벌어질 수 있다."에서 시작해야 한다.
모두가 평화로운 시기는 있을 수 없지만 누구나 위로받을 수 있고 누구나 기댈 곳이 있는 시기를 보낼 수 있기를 바란다.
44p.
불문과에서는 무얼 하는가.
문제는 내 생애에서 이렇게 질문해오는 사람이 그 사람으로 끝난 것이 아니란 것이다.
그 질문은 처음부터 내 의견을 듣기 위한 것이 아니라 봉쇄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내가 사회의 발전에서 앞으로 오게 될 세계의 그림을 문학이 항상 먼저 그려왔으며, 우리 사회의 민주화 과정에서도 그 점은 마찬가지라고 말한다면, 그는 어쩌면 자신의 세계관에 적대할 사람들을 불어불문과에서 기르고 있다고 아연 긴장하게 될지도 모른다.
단상
나도 어쩌면 이러한 류의 질문을 많이 해왔던 것 같다.
부끄럽다.
51p.
산딸기 있는 곳에 뱀이 있다고.
개천이 긴 어항으로 바뀌었을 때, 거기 등을 붙였던 중소상인들의 삶도, 한국 예술에 새로운 감수성을 불어 넣던 언더그라운드 예술의 터전도 함께 사라졌다.
뱀처럼 구불구불한 강은 이제 볼 수 없을 것이다. 그 구불구불한 뱀이 삶에 미치던 위험은 아마 사라졌을 것이다. 그 전의 강의 삶도, 거기 몸 붙였던 생명의 삶도, 사람의 삶까지도 사라지고 없을 테니까 말이다. 뱀이 없는 곳에는 산딸기도 없다.
단상
나의 과거, 추억이 담긴 공간이 세련되지 못하다는 혹은 다른 이유로 모두 없어져야 한다고 한다면, 물을 것이다.
무엇때문에 세련되어야 하며, 누가 그것이 현재와 어울리는지 아닌지, 지금은 없어져도 될 것이라고 판단할 수 있는 권리를 갖는지. 그런데 또 누군가는 물을 것이다. 그대의 삶을 존중하나 그대가 아닌 지금의 다수가 원한다면 자리를 내어달라고.
지금 우리가 걷는 이땅은 지금 걷고 있는 우리가 사는 곳일까? 이땅을 걸었던 모든이가 사는 것일까?
그들이 걸었기에 이땅을 우리도 걸을 수 있었다는 것은 아닐까? 청계천을 그렇게 다니면서 한번도 이전의 청계천을 궁금해 하지 않았던 나를 반성한다.
57p.
삼학도의 비극
따지고 보면 학문의 위기고, 대학의 위기다. 생각을 생산하는 일이 아니라 생각을 소비하는 일에만 매달릴 떄 그 위기는 피할 수 없다.
88p.
봄날은 간다.
젊은 날의 삶은 다른 삶을 준비하기 위한 삶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그 자체를 위한 삶이기도 하며, 어쩌면 가장 아름다운 삶이 거기 있기도 하다.
성장통과 실패담은 다르다. 두 번 다시 저지르지 말아야 할 일이 있고, 늘 다시 시작해야 할 일이 있다. 어떤 아름답고 거룩한 일에 제힘을 다 바쳐 실패한 사람은 다른 사람이 그 일에 뛰어드는 것을 만류하지 않는다. 그 실패담이 제 능력을 극한으로 발휘하였다는 승리의 서사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봄날은 허망하게 가지 않는다. 아름다운 것들은 조금 늦어지더라도 반드시 찾아오라고 말하면서 간다.
97p.
맥락과 폭력
맥락을 따진다는 것은 사람과 그 삶을 존중한다는 것이다. 맥락 뒤에는 또다른 맥락이 있다. 이렇듯 삶의 깊이가 거기에 있기에 맥락을 따지는 일이 쉽지 않다.
100p.
금지곡
판단하고 선택하기전에 모든 것을 보지도듣지도 못하게 가려놓은 채, 생명에 삽질을 하고 시멘트를 발라 둑을 쌓아둔다면, 거기에 고이는 것은 창조하는 자의 사랑이 아니라 굴종하는 자의 중오일 것이다.
106p.
내가 믿는 대한민국의 정통성
나는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굳게 믿는다 .... 그 밑에서 핍박받은 사람들이 정의로운 세상을 만들겠다는 염원을 버리지 않았고, 그래서 '옛날과 많이 달라진'세상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인간답게 살기를 애쓰는 백성들이 있었기 때문에 정통성을 얻었던 것과 같다.
단상
우리의 자리에서 세상과 나라에 눈을 부릅뜨고 있기를 멈추지 말자.
109p.
민주주의 앞에 붙었던 말
자유는 좋은 것이다. 그러나 민주주의라는 말이 이땅에서 자유를 억압한 적은 없지만, 민주주의 앞에 붙었던 말은 민주주의도 자유도 억압했다. 이를테면 '한국적 민주주의'가 그렇다.
단상
한국적이라는 추상적인 개념하에 자행된 역사를 떠올려본다. 갑자기 엄마니까라는 모호한 이유를 대며 내가 했던 부끄러운 일들이 떠오르는 건 왜일까.
폭력에 대한 관심
자신의 불행이 어른들의 개입으로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을 저 아이도 알고 있을 것이다.
우리는 너무나 많은 폭력속에 살고 있고, 그 폭력에 의지하여 살기까지한다.
모든 아이들이 성적순으로 줄 세우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면서도 너는 앞자리에 서야 한다고 말하는 것도 폭력이다. 의심스러운 것을 믿으라고 말하는 것도 폭력이며, 세상에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살아가는 것도 따지고 보면 폭력이다. 어떤 값을 치르더라도 폭력이 폭력인 것을 깨닫고, 깨닫게 하는 것이 학교폭력에 대한 지속적인 처방이다.
단상
의식하지 못한 폭력을 저지르고 또 받으며 살고 있음을 느낀다. 내가 추구하는 방햐을 고집하는 것도 내가 바라보는 세상에 대한 시선을 주입시키는 것도 내 아이에겐 인생의 방향을 좌지우지하는 어마어마한 폭력일 수 있겠다.
황금과 돌
천년세월을 팔아 한시절을 살려 하고 있다.
시대의 비천함
그들의 자리를 차지하게 될 것은 진실이야 어찌되었거너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연극하는 사람들일 것이라고 썼다.
영어강의와 언어 통제
언어의 깊이가 주는 정서를 학문의 습득과 함께 누리지 못하는 탐구는 모든 지식을 도구화할 것이다.
189p.
장옥이 각시의 노래
우리가 이 전문가들의 그 일을 맡긴 것은 바로 작품의 예술적 의도를 살피고 그것이 우리의 삶을 풍족하게 하는가를 깊이 헤아려달라는 뜻 아니던가.
198p.
밑바닥 진실 마지막 말
이 마지막 진실이 항상 과격한 형식으로 드러날 때, 그것이 우리의 삶 자체를 불안하게 흔들고, 맣하는 사람 자신을 궁지로 몰아넣는 함정이 되는 것도 사실이다.
204p.
윤리는 기억이다
어떤 사람에게 현재는 눈앞의 보자기만한 시간이겠지만, 또다른 사람에게는 연쇄살인의 그 참혹함이, 유신시대의 압제가, 한국동란의 비극이, 식민지 시대의 몸부림이, 제 양심과 희망 때문에 고통당했던 모든 사람의 이력이 모두 현재에 속해있다. 미학적이건 사회적이건 일체의 감수성과 통찰력은 한 인간이 지닌 현재의 폭이 얼마나 넓은가에 의해 가름된다. ..... 당신이 잊고 있는 것은 무엇이며 기억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단상
세상은 변했다는 말을 함부로 입에 올린 날이 기억난다. 기억의 강도에 따라 10수년도 어제, 어쩌면 오늘로 붙잡아 둘 수 있겠다. 세월호사건에 대해 이제는 그만 할때도 되지 않았나라고 말하는 사람들에겐 그것은 과거일테지만 내곁에 있던 자식이 지금 없는 부모들은 그것은 현재 진행형이구나. 나에게도 막연했던 그 슬픔의 감정이 조금은 알것도 같다.
죽는 날까지 일본에 사과를 요구하였던 할머니들의 마음이 그런 것이 었을까?
매일 고통의 현재를 사셨다면 정말 얼마나 괴로우셨을까. 마음이 아파온다.
212p.
먹는 정성 만드는 정성
삶을 깊이 있고 윤택하게 만들어주는 요소들은 우리가 마음을 쏟기만 한다면 우리의 주변 어디에나 숨어있다.
매우 하찮은 것이라고 하더라도 내 삶을 구성하는 것 하나하나에 깊이를 뚫어 마음을 쌓지 않는다면 저 바깥에 대한 지식도 쌓일 자리가 없다. 정신이 부지런한 자에게는 어디에나 희망이 있다고 새삼스럽게 말해야 겠다.
단상
나의 아이에게 바라는 것이 있다.
작은 행복을 놓치지 않길 바란다는 것.
느낄 수 있는 모든 행복을 느끼길 바라는 것.
이것이 감수성이구나.
같은 경험에서 다른 깊이를 느낄수 있는 아이가 되게하려면 아이의 삶을 구성할 모든 시간에 마음을 쏟을 시간이 필요하겠다.
아이에게 여유를 줄 수 있는 엄마가 되어야 겠다.